[스크랩] 학급신문 만들어 배포하다 퇴학당하고, 불만은 다른데서 터지고...
나는 중학교때 이화여고에 가고 싶었다. 이유는 단순하게 조금 멀어도 버스 한 번 타고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들어 갈 확률이 높은 언니가 다니는 ㄱ고는 학생들 인권(?) 탄압이 심한데다 제대로 된 서클 하나 없었기에 그 ㄱ고로는 절대 가고 싶지 않았으나 어디 그게 내 맘대로 되는 일인가...
난 결국 역시나 대로 ㄱ고로 배정을 받았다...
역시나 정규 수업 전 보충 수업 2시간, 정규 수업, 또 보충 수업 2시간, 야자(야간자율학습) 로 아침 7시 반 ~ 밤 10/11시 까지 공부 또 공부, 시험공부의 연속에다 전후기 대학 진학률 7,80% - 당시 현역 + 재수, 삼수, 사수, 장수 다 합한 학생의 대학 진학률은 40%로 정말로 바늘 구멍을 통과해야 하는 시대였는지라 - 라고 자랑을 일삼는 교감의 독재 아래에 우리는 그저 입다물고 하라는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교장은 정말 허수아비였음)
우리 1학년이 들어 오기 전 이미 졸업한 선배들과 2,3학년 선배들은 참교육 쟁취로 시위하다 누가 불렀는지 - 누가 불렀겠어? - 경찰과 백골단(<-- 일설에 의하면 백골단이 실제로 온 건 오버라는 선배도 있음)까지 와서 곤봉으로 맞고 경찰서에 끌려가 정말 괴롭고 쓰고, 처절함까지 맛 보기까지 한 2,3학년 선배들 사이에선 무언가 억누른 감정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띄고 있었다.
교감은 이미 선배들에게 '이사도라'로 불렸는데, 학생들 뭐하나 감시하려고 24시간 돌아 다니기 때문이었다. 학생 3명이상이 모여서 조용히 수다라도 떨고 있으면 어느새 나타난 이사도라는 "아니, 무슨 얘길 그리 소근 소근 하시나?" 하고 얼굴을 들이밀고 묻기까지 했고, 묻지 않을때는 가까운데서 엿듣기까지 하는데다 교실마다 도청 장치가 있다는 소문도 돌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는 고2가 되었고, 이과반인지라 교감의 감시에서 확실히 자유로울 수가 있었다. 그때 나는 고3 문과반 오빠 12명이 결성한 서클에 가입을 했고, 그 서클은 당연히 음성 서클이었다. (학교 = 이사도라가 인정한 서클은 합창단과 선도부, 애향단 뿐이었으므로 그외의 서클은 다 음성이었음)
우리 서클은 이사도라의 눈을 피하기 위해 절대 학교 안에선 서로 아는 척을 안했으며, 연락은 늘 비상 연락망으로, 모임은 같은 곳에서 2번 이상 하지 않는 등 철두철미하게 조심을 하며 활동을 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날 서클짱이던 오빠가 학급 신문을 만들어 같은 반 학생들에게 배포를 하는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그동안 그 오빠를 주시하던 교감은 학급신문을 이유로 그 오빠를 그 오빠의 담임이나 학생부 선생들과의 상담 한 번 거치지 않고, 첫 징계를 퇴학으로 단 몇 시간 만에 단신으로 결정하여 그 오빠를 퇴학 조치 시켜 버리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고작 학급신문인데??? 고작 학급신문으로 퇴학을???
그 교감이 게시판에 발표한 퇴학이 이유는 무엇일까?
*< 거짓 사실 유포, 거짓 사실 선동, 학생의 의무를 일탈한 탈선 행위 > 였다.
그럼 그 오빠가 만든 학급신문의 내용을 무엇일까?
*< 현 교육의 문제점과 문제성을 지적 - 입시 위주의 비전인적인 교육 실태 >
*< 우리가 해야할 일과 할 수 있는 일 - 나만이 아닌 더불어 사는 삶을 인식하고, 참교육의 중요성을 인식 >
시위를 하자느니, 또는 시위를 선동하고자 하는 내용이 아니었고, 더군다나 해직당한 전교조 교사들에 대한 코멘트도 없었음. 다만 우리가 현 교육의 문제성을 인식하고, 나아가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지금의 교육의 문제점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조용했다. 폭풍전야와 같이 조용히 조용히 이사도라 독재와 학생 인권 탄압에 대한 불만은 팽배해져 가고만 있는데, 그것도 모르는 이사도라는 자기에게 옛날 처럼 바른 소리들 하는 전교조 교사들이 없어 e편한 자기 세상이었다.
그러고 나서 2,3주일 후, 그 오빠와 같은 반인 오빠가 원효대교에서 자살을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자살한 오빠는 담배를 피다가 이사도라에게 걸렸는데, 이사도라가 자기 세상였는지라 입을 함부로 놀렸다. "너도 퇴학시켜 줄테다!!!" 부모님의 프렛셔와 너무나도 엄한 아버지가 퇴학 당한 자신을 어떻게 대할까 무서워 원효대교에서 신발만 놔두고 가버린 그 오빠의 유서는 이사도라가 쥐고 유서는 없었다며 일관했고,
그 오빠의 자살로 그 오빠 반 학생들, 아니 전교생이 이성을 잃고 정말 눈이 뒤집혀, 중립을 지키는 학생들과 교사들 조차 두려움에 떨었으니 그때의 이사도라의 심장은 어떠했을까... (이미 체육 선생의 가드를 받아 도망 하여 교내에는 없었다고 함)
그리하여 7월 3일 기말고사 일주일 전에 우리 학교는 임시 방학을 선포했고, 그 후 우리 서클은 후배들 보호와 퇴학과 자살 학우 문제 대책위 일로 3학년 선배들이 임시 해산을 선포하였다.
난 그때 학생/민중들이 독재에 대한 불만은 성격이 다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도화선이 되어 공포감을 뛰어 넘어 모두가 일어설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 우리 세대는 사월의 세대도 전태일 세대도 오월의 세대도 유월의 세대도 솔아 푸르른 솔아의 세대도 아닙니다. 하지만, 선대들을 보고 자랐으며 지금도 끓을 수 있는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어디로 갈꺼나 길 잃어 보여도, 우리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더라도, 우리는 엉겅퀴가 아니더라도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이 강산이 푸를 수 있음을, 또다시 그날이 오면 내 형제도 내 친구도 모두가 기쁘게 맞을 수 있는 가슴이 있음을 작년부터 줄곧 재차 느끼고 있는 요즘입니다. "
*** 그 후 퇴학 당한 오빠는 입시를 앞 둔 친구들을 위해 등교 시위도 포기하고, 학교측과 싸우는 친구들과 자퇴하려는 친구들을 달래었고, 자신은 검정 고시로 학업을 맞쳤습니다. 자살한 오빠는 방학 중에도 여전히 등교하여 - 자살한 학생이 일주일째 등교하고 있다...(강풀의 이웃 인용) - 수위 아저씨들과 몇 몇의 교사들을 휴직시키고 후배 1명까지 입원하게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