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삶/사는 이야기

좋은 말이 아니면 . . .

일레인홉의 생각없는 한마디 2007. 10. 27. 16:48
10월 5일.

어차피 잃을 머리카락.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치장하고 멋내는 것은 지겹지만, 내 자신을 가꾼다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그것이 외면이건 내면이건간에.

제 헤어 드레서는 제 머리 스타일을 20여년을 만져주신 분이십니다. 미장원을 올해에 다른 분께 파시고,  새 주인으로부터 스테이션을 렌트하셔서 주 며칠만 근무하시며 단골들의 머리를 계속 만져주시고 계십니다.

그 분은 동네 소식을 모르시는 것이 없습니다.

"네."
"아니오."
"그렇군요."
"저런."
"아..."
"정말이에요?"
"하하하"

...를 무심하게 반복하고 있자면 내가 사는 지역의 웬만한 한국분들의 집안 소식을 그 분에게서 다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날 따라 웬일인지, "오늘의 뉴스" 주제는 암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재스민의 남편이 루퍼스에 걸려 병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루퍼스가 뭐야? 그 병 검사하는 중에 글쎄 암을 발견을 했데. 이제 남편 병원에 데려다 주느라고 재스민이 오는 손님들을 다 놓치고 있어.  돈도 더 필요할텐데 곤란하게 되었어."

"오 아무개씨 아나? 그 분이 글쎄 프로쉬이이이..뭐지? 그  암에 걸리셨데. 치료가 잘 안되고 있나봐.  쯧쯧쯧."

"모모 교회의 아무개 목사 알아? 아는구나. 그 분이 폐암에 걸려서 돌아가셨데잖아. 우리 며느리가 약사잖아 (은근 슬쩍 자랑).  그래서 그 목사님 아들을 아는데, 글쎄 돌아가셨다네."

"어쩌고 가게 사장 아무개씨는 자궁암에 걸려서 수술을 했데. 자궁을 다 들어냈다는데, 자식은 있는지 몰라. 그게 뭔 일이람."

그 분이 들려주시는 소식에 손님들과 다른 헤어 드레서들의 이바구도 합쳐지니, 암에 의해 고생하시는 또는 치료에 실패하신 이웃 한국분들의 안좋은 소식들을 다 알게 된 듯 합니다.

평소같았으면 그저 마음이 아픈 것으로 끝났겠지요. 그런데 평소와 이번이 다른 것은, 내 자신이 암환자라로서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는 것입니다. 듣고 있어도 상관 없지만, 계속 듣고 있고 싶은 이야기도 아니었습니다.

"저기요. 제가 암 환자거든요."

라고 말 할 수도 없는 입장입니다.  누가 죽었네, 남자/여자 구실 다 했네, 자식의 병에 부모 가슴이 찢어지네, 의료 보험이 없어서 치료하느라고 재산을 탕진했네하는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데, 제가 불쑥 그런 말을 하면 얼마나 당황들 하시겠습니까.

암을 앓고 있다는 것이 무슨 자랑도 아니고, 묻지도 않았는데 대뜸 말하는 것도 영 썰렁합니다. 말하고 난 다음에 쏟아질 질문 공세와 동정을 생각하니, 내가 참고 말지 하는 생각도 나고, 앞으로 그들의 이바구 메뉴에 다른 사람들처럼 오르내릴 것을 생각하니 미리 지긋지긋해집니다.

사실 못 듣고 있을 것도 아니지요. 사람이란 그렇게 드라마같은 남의 이야기를 들으며 스스로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자신이  놓인 상황에 대하여 감사와 위안도 받으며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거울에 비친 나를 보며, 문득 이 자리에 나의 입장에 계셨던 분이 몇 분이나 되셨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식이 병에 걸린 분, 배우자가 병에 걸린 분, 부모가 병에 걸린 분, 그리고 본인이 병에 걸린 분. 그 분들은 다른 사람들이 지지배배 떠드는 행복하지 못한 색채의 자기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무디고 씩씩하고 태평한 성격인 나도 부정적이기만 한 이야기들에 약간의 짜증이 나려고 하는데, 그 분들의 심정은 어떠셨을까요.

무엇보다도, 혹시 내가 이런 무딘 말로 남의 가슴에 상처를 입히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암으로 돌아가신 우리 식구들에 대해 간혹 이야기하는데, 혹시 그 이야기를 듣던 분들은 암환자이셨거나 식구 중에 암환자가 계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병자와 그 가족들에게 치료 실패담은 매우 침울하고 겁이 나는 것일 텐데, 나는 무디게도 그런 실패담을 그 분들에게 해서 좌절감과 공포를 느끼게 했을지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자고로, 좋은 말이 아니면 하지 말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If it is not anything good, don't say it at all.). 정말 옳은 말입니다. 긍정적이고 칭찬이고 좋은 말이고 밝은 말이 아니라면 꺼내지를 말라는 그 말이, 평소보다 더욱 더 가슴에 와 닿습니다.

여러분은 남의 흉을 쉽게 보시는 분이십니까? 흉이 아니더라도, 나도 모르는 사이 실패담, 부정적인 색채가 있는 이야기등을 무심하게 입밖으로 내보내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그래서 다른이들의 가슴에 상처를 입히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좋은 말이 아니면 하지를 말라는 말. 우리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거울안의 나를 보니, 수북하고 굽실굽실하고 색도 고운 건강한 머리가 어깨위로 흘러내려와 있었습니다. 저 아름답고 자랑스러워했던 나의 머리카락이 두서 달쯤이면 없어져 있겠지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섭섭합니다.  앞으로 몇 달간 미장원에 올 일도 없겠지요.


평소에 머리를 빡빡 밀어보고 싶었는데, 부모님 노하실까봐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놀랄까봐 못해 왔습니다. 이번 기회에 한 번 해보게 되어 섭섭하면서도 은근히 기대되는 것은 웬일일까요. 하하하.